2024. 1. 4. 15:23ㆍ서가

1. 벽은 196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벽의 주인공은 벽 안의 세계에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적었고, 작가인 마를렌 하우스호퍼는 집안일과 치과의인 남편을 도와 병원 일을 돌보느라 집필에는 하루 세 시간도 내기 힘들었지만 글을 계속 썼다고 한다. 어쩐지 그 또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적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2. 주인공의 이름은 결국 나오지 않는다. 그는 몇몇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계속 부르지만 자신의 이름은 글에 남기지 않았다. 부를 사람도 없었으나 다시 불릴 것이라 기대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 그런 세상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주인공처럼. 책을 읽는 내내 상상한 장면들에서 움직인 것이 주인공이었을까 나였을까.
3. 벽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서 기존의 세상과 주인공이 있는 산 속(이라기엔 산맥까지 포함하는 꽤 넓은 공간이지만)을 분리한다. 단순히 벽이라기엔 날아가던 새가 부딪혀 머리가 깨지는 것을 보면 돔의 형태가 아닐까싶지만, 하늘을 날 수 없는 주인공과 동물들이 느끼기엔 벽에 가깝다. 기존의 세상은 아마도 벽이 생기는 동시에 멈췄을 것이고, 생명체들은 돌이 된 듯 모두 멈췄다. 사람부터 동물, 아주 작은 벌레까지 벽의 밖에선 생존의 징후가 없다. 벽은 그 순간 주인공을 가두는 무언의 형태에서 기존 세상의 재앙으로부터 주인공을 보호하는 장치를 겸한다. 벽 안에서의 삶은 기존 세상에서 누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살아가기를 결심한다. 순환하는 하나의 거대한 테라리움이 된 것이다.
4. 이 ‘벽’이라는 개념은 낯설진 않았다. 미드에서 몇 번이나 본 것이다. 처음은 다 보진 못했지만 <언더 더 돔>이라는 드라마였고, 그 다음은 <더 소사이어티>였다. 두번째는 시즌 캔슬이 되어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언더 더 돔이 벽에 영향을 받은 작품인지 궁금해 찾아보니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이라는 2009년작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시대순으로 봤을 때 나는 아마도 스티븐 킹이 벽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비록 그의 뛰어난 소설들이 많고 (영상화된 작품이 한 둘이 아니니까 말이다.) 두 작품이 진행되는 방향은 전혀 다르지만 ‘벽’이라는 작품의 근간이 되는 컨셉은 같으니 말이다. 벽보다 더 먼저 벽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지만 아마도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5. 주인공이 가진 것 중 원래 주인공의 것은 별로 없다. 그는 사촌 부부의 산장행을 따라 가볍게 온 것이며, 이곳의 물건 마저도 사촌 부부 중 남편인 후고의 병에 가까운 걱정에서 비롯된 수집벽과 우울증이 아니었더라면 대부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작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벽 밖에 있어 아주 짧은 순간 결말을 맞이했겠지만 그가 남긴 식료품과 생필품, 공구 등은 주인공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주인공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다 후고가 남긴 물건들 덕이다.
6. 주인공과 작품 내내 함께하는 동물들은 다음과 같다. 후고 부부의 개이던 룩스, 비오던 어느 날 찾아온 고양이(고양이는 결국 이름없이 고양이로 불린다.), 홀로 발견된 소 벨라, 고양이가 낳았던 페를레, 판터, 티거(낳았으나 바로 죽은 아기 고양이들도 있었다.), 벨라가 낳은 송아지(송아지 또한 결국 송아지로 불렸다.) 그리고 까만 까마귀들과 함께 찾아오나 언제나 혼자 멀리 떨어져있던 하얀 까마귀. 이들 중 몇몇은 제각기 불의의 사고로 주인공을 떠나지만 주인공은 그들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7.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소가 나에게 축복인 동시에 커다란 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멀리 나가 돌아다니는 일도 힘들 것 같았다.
소 같은 가축은 먹이를 챙겨주어야 하고 젖을 짜주어야 한다. 그래서 붙어 앉아 보살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소의 주인이자 소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소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곳에 소를 남겨두고 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는 그만큼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이 부분을 읽으며 너무나 한국인스럽게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가진 것들은 모두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 뿐으로, 무소유의 난과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스님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가진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쉴 틈이 없다. 동물들의 먹이를 챙겨주며 돌봐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때가 되면 감자와 콩을 심고 수확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장작을 마련하며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순환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힘들다고 내내 쉬거나 아프다고 한없이 누워있을 수도 없다. 벽 안에서 순환을 이어나가지 않는다면 굶거나 얼어 죽는다. 가볍거나 가볍지 않은 상처이거나 모두 혼자 처치해야하며, 아픔은 고통에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견뎌내야한다. 외로움마저 동물들의 출생이라는 순환을 벗삼아 견뎌낸다. 매번 너무 사랑할 것에 두려워하나 결국 태어나는 동물들을 사랑하게 되며 주인공은 살아간다. 죽어 태어난 동물들조차 오래 마음을 줬으면 더 아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짐짓 담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8.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누구한테 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진실을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생 동안 거짓말을 하며 위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9. 과거의 언젠가 나였던 여자를 떠올리면, 그러니까 앙증맞은 이중턱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고 부단히 애쓰던 여자를 생각하면 아무런 애착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엄하게 질책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에게는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꾸려갈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덥석 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많은 의무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장부였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여장부 타입은 아니었고, 평범한 이성을 가진, 과중한 짐을 지고 고통받는 여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들에게 적대적이며 낯설고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살고 있던 사회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대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가 항상 알 수 없는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0. 그는 기존 세상에서의 규칙에서 진작 벗어났다. 세상이 벽 안을 빼고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사회에서 체화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때론 그를 ‘인간답게’ 행동하게 해주지만, 반대로 자유롭지 못하게 억압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으로서 그는 벽 안에서 점점 속박을 벗어난다. 인간 사회에서의 가장, 그리고 여성으로서 강요받았던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하여 결국 그저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남는다. 나이도 성별도 필요없는 생존하는 하나의 동등한 종으로서 말이다.
11. 딸들은 모든 구속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의 생명도, 죽음도 낳지 않는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2. 벽은 이제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몇 주씩 벽을 잊어버리고 지내기도 한다. 벽을 떠올릴 일이 있더라도 이제 벽은 내 발길을 가로막는 벽돌담이나 정원의 울타리 같은 것일 뿐이다. 사실 벽이 그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내가 모르는 물질과 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상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런 것들은 벽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벽 때문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이전이나 다름이 없다. 태어남, 죽음, 계절의 바뀜, 성장과 소멸. 벽은 죽어 있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다. 말하자면 벽은 내가 마음을 쏟을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벽에 관해서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3. 지금까지 주인공은 살면서 만났었던 벽이 너무 많았기에 되려 벽을 벽 이상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좋다고 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내가 겪어본 지위이거나 살면서 보았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는 벽들. 그런 것들에 비하면 그저 그 자리에서 기존의 세상과 단절하기만 하는 벽은 정말 그저 벽일 뿐인 것이다. 그 벽은 점점 안으로 조여오는 것도 아니고, 시시때때로 상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곳에 존재하는 물리적 경계의 형태인 것이다.
14. 나의 사랑에는 분별력이 없다. 꿈속에서 나는 아이들을 낳는다. 사람의 아이도 있지만 고양이, 강아지, 송아지, 곰, 처음 보는 짐승의 아이도 있다. 모두 내 몸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주지 않는다. 단지 내가 그들에 관해 인간의 문자와 인간의 말로 적으려다 보니 낯설게 느껴질 뿐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5. 그는 그저 생존하는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16. 시간이 오직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이라면, 내가 죽는 순간 시간도 멈출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내가 시간을 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거대한 그물망이 찢겨지며 시간은 품에 안고 있던 모든 것들과 함께 망각 속에 묻힐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나한테 마땅히 고마워해야 하겠지만, 내가 죽고 난 다음 시간을 살해한 것이 나라는 걸 알아줄 사람은 없다. 사실 이런 생각은 아무 의미도 없다. 세상일이란 그냥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7. 나보다 먼저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어떤 일의 의미라는 것은 단지 그것이 일일 뿐이라는 사실을 허영심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심코 밟아 죽인 풍뎅이는 비극적인 이 사건에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비밀스러운 연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풍뎅이는 그저 내가 걸어가고 있던 순간 내 발밑에 있었던 것뿐이다. 햇빛 속을 맘 놓고 기어가다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고, 그러고는 끝이었다. 오직 인간들만이 있을 수도 없는 의미를 찾아 헤매느라 고생을 한다. 내가 언젠가는 이런 인식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몸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굳건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18. 인간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 의미란 것은 참으로 다양해서 어느 때는 슬픔을 중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자신의 뛰어남을 과시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모든 사람이 다르게 의미를 둔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이렇게 적는 것조차 의미를 두려는 행동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꽃이 피고 지는 것조차 기뻐하고 아쉬워하며 슬퍼하지만 꽃은 그저 피었다 질 뿐이다. 자연의 순환에도 흐름은 있으나 모든 종은 저마다의 흐름을 가지며, 그 흐름은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약속된 특정한 ‘시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시계가 모두 멈춰서 시간이 사라져도 흐름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이상 결국 시간에 휘둘리겠지만, 시간이 사라진 세상은 정말 자유롭고 여유로울지도 모른다.
19. 추억과 슬픔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20. 추억과 슬픔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 문장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산다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끌어안고, 둘러메고, 그 안에 파묻혀가면서도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들고 지칠 땐 왜 나는 이렇게 힘들지, 하는 생각보다는 그저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거지, 하는 마음으로 그저 하나의 존재가 되어 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새해를 시작하기에 벽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 저자
- 마를렌 하우스호퍼
- 출판
- 고트
- 출판일
- 20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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