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원작 : 인어공주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2024. 4. 17. 11:10서가




  어렸을 적부터 왠지 모르게 좋아하던 동화 중 하나는 인어공주였다. 커서는 살면서 하나씩 왜 그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었는지 선명히 알게되는 순간들이 좋았다. 예를 들자면 우선 인어공주는 비록 남성 작가가 쓴 이야기지만 여성의 이야기인게 좋았고, 인어라는 환상의 존재인게 좋았고,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깨닳았는데 ‘목소리’ -목소리에 대해선 언젠가 다시 쓰고 싶다.- 를 다룬단 점이 좋았다. 원작에서는 인간이 되는 약을 만들기 위해 혀를 재료로 하면서 마녀에게 목소리를 준다. 사실 원작의 마녀는 나쁜 존재가 아니다. 으스스한 곳에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이 나쁜 인상을 주지만 인간이 되고 싶다고 찾아온 인어공주에게 미리 예상되는 나쁜 것들을 다 말해주고 후회할 것이란 점도 알려준다. 인어공주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디즈니의 변형처럼 나중에 변신해서 인어공주의 라이벌로 등장한다던지 그런 것도 아니다. 인어공주가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약에는 여러 재료도 들어가고 약을 조합하면서 들어가는 지식과 노동력의 대가로 받은 것은 목소리 뿐이다. 약에는 심지어 마녀 자신의 피도 들어간다. 인어공주도 혀를 약의 재료로 삼았으니 목소리가 있었어도 전처럼 말하거나 노래하긴 어렵지 않았을까. 마녀는 인어공주의 목소리로 무엇을 했을까 가끔 상상해본다. 우리가 마녀에게 가지는 나쁜 이미지 -아마도 철저히 학습된-는 자꾸만 못된 방향으로 상상을 하게 하지만 나는 그 마녀가 나쁜 것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뼈로 만들어진 집에 살면서 두꺼비와 물뱀들을 키우던 마녀는 가끔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약을 만들어 준 인어공주가 소망을 이뤘길 바라면서. 나중에 찾아온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주며 인어공주가 돌아올 수 있도록 단검을 만들어줬을 때는 그 계획이 성공하길 바라면서. 시간이 지날 수록 그가 나쁜 존재가 아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을 가진다. 세상이 아무리 마녀들에게 오명을 씌운다해도.


  사실 원작의 인어공주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어린 시절 디즈니에서 봤던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인간의 물건들을 수집하고 탐구하던 그 모습은 인어공주 언니들의 모습이다. 원작의 인어공주는 멋진 인간의 조각상을 세운 자신의 정원에서 바다 위 인간 세상을 상상하며 대부분 사색하는 조용한 존재다. 그 후 열다섯 생일이 지나 바다 위로 오르고 왕자를 본 뒤 사랑에 빠지고 구해준다. 구해 준 뒤에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그 구분은 인어공주에게 무의미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존재에게 왜 사랑을 얻으려하겠는가. 나중엔 인간이 되는 약을 마녀에게 받아서 왕자를 만나러가는 제법 대담한 모습도 있지만 디즈니의 호기심 많고 발랄한 에리얼에 비하면 수동적이고 사랑을 얻는데에만 저돌적인 면은 매력적이지 않다.


  안데르센이 동성을 짝사랑하고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썼다는 인어공주의 배경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제법 많은 부분이 이해된다. 현실에서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 -인어와 인간의 차이를 넘어서도 인간 세상에서 둘의 신분의 차이도 명확했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상황을 보자면 그 시대 동성과 함께 행복한 결말을 바랄 수 없었다는 점도. 서로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제하고도 말이다.-와의 결말은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비춰지는 배경이 되지만. 가끔 물거품이 되어 끝난다는 결말을 진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안데르센이 썼던 원작의 결말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저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정령이 되어 영혼을 얻기 위해 세상을 떠돌며 착한 일을 했을 인어공주의 시간을.


  인어공주는 왜 왕자를 사랑했을까. 인어도 아닌 인간을. 우선은 그가 왕자이기에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어공주도 우선은 공주이고. 인어공주의 마음에 처음 든 인간 남자여서 였을 가능성이 아마도 가장 크지 않을까. 인어공주의 정원에 있던 조각상같은. 당연히 처음 본 인간 남자여서는 아닐 것이고 -왕자의 열여섯 생일을 맞아 배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인어공주 취향이 들어있었겠지. 안데르센은 짝사랑하던 사람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고 이미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다른 이유란 필요치 않은 것처럼.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져야하는 운명에서 쓰여졌고, 현실의 안데르센처럼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했으나 결국은 구원받았다. 안데르센도 자신이 그렇게 사랑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궁금한 것이 남는다. 인어는 왜 영혼이 없다고 했을까. 아마도 그 설정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서양 기독교적 문화에서의 믿음이라던가, 인간인 왕자를 사랑하기 위해 영혼이 없는 인어가 사랑으로 영혼을 얻어야한다는 설정을 했다던가, 애초에 인간 이외에는 영혼을 가질 수 없다는 (그렇다기엔 오래전 애니미즘이 있었지만)인간의 오만한 상상력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인어도 영혼이 있다고 이야기했다면 인어공주는 왕자를 사랑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인어공주가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면, 그래도 그는 인간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가족을 두고, 다시는 바다 속에서 헤엄칠 수 없고, 목소리도 낼 수 없고, 걷기만 해도 날카로운 칼 위를 걷는 아픔을 느끼는 길을 선택했을까. 심지어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물거품이 되는 길을 말이다. 하긴 언제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상상했다면 -영혼을 가진 이가 죽어서 별들 너머 영광의 세계로 가는 것이 진정 행복이라면- 인어공주의 언니들이 열다섯 번째 생일날 바다 위를 구경하는 것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점점 시시해졌듯이 잊혀졌을 것이다.


  수 많은 이야기에서 인간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기꺼이 영혼을 내거는데 어떤 이야기들에서는 영혼이 없는 존재들이 그저 ‘영혼’을 갖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건다. 도대체 영혼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실체도 없고 확신도 없는 것을 인간들은 어떻게 확신하고 믿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에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영혼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그 믿음 자체를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혼과 함께 이야기를 하기엔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지만, 마치 우리가 돈이라는 것을 믿는 것처럼. 나라마다 다른 색색의 종이와 동전과 자산이라 불리는 데이터 숫자들이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것처럼. 그것의 가치는 정말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전쟁이 나서 실물이 우선하게 되는 경우와 세상의 모든 데이터가 날아가서 자산을 증명해줄 길이 없다면 그것엔 여전히 가치가 있을까?- 타인들이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우리도 그것을 믿는 것 뿐이다. 그 타인들도 다른 타인들이 믿고 있다고 믿기에 믿는 것일 뿐이고. 그저 믿음과 신뢰로 돌고 도는 와중에 가치가 있다는 상상이 돋아난 것처럼, 어쩌면 영혼도 그런 것이 아닐까. 숨쉬고 움직이고 말하던, 관계를 가지던 이가 어느 날 돌연 숨을 거두고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위로받을 것이 필요하니까. 영혼과 사후세계는 그런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믿음일 것이다. 오래된 믿음은 그 자체로 힘을 얻는다. 마치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것처럼. 그리고 본래 인간들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가. 영혼을 믿지 않는 이에게도 당신은 영혼이 없다면 기분이 나빠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인어공주에게 인어도 사실은 영혼이 있다고 말해줬더라면, 우리가 아는 인어공주는 탄생하지 않았겠지만 어느 바다 속에서는 300년동안 행복하게 살았을 인어공주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또 그런 상상을 해본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어공주 원작에서 악역은 없다. 그러나 우습게도 가장 악역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인어공주이다. 만약 언니들에게서 얻은 단검으로 왕자를 찔렀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짝사랑에 아파하거나 아파 본 사람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았던 왕자를 나쁘다고 할 것이며, 남자를 미워하지 못하고 여자를 더 미워하는 사람은 이웃나라 공주나 마녀를 악역이라고 지목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조차 차마 슬픈 -사실 슬프진 않은 공기의 정령이 되었으나- 인어공주를 고르진 못할 것이나 사실이 그렇다. 왕자는 인어공주를 사랑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비록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것도 그의 의지는 아니다. 물에 빠져 기절해있었고 어떤 인간이 인어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인어와 일상에서 만나는 세계관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와달라고 한 적이 없다. 모르는 사이 인간이 된 인어공주에게 희망고문을 했을 수는 있으나 그는 내내 인어공주에게 호의를 베푼 편에 속하고 -비록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시혜적인, 귀여워 하는 것에 내주는 사랑에 가까웠던 점은 지목할 만하지만- 그의 죄라면 단 한 번의 입맞춤 뿐이다. 아니면 인어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결혼을 축복해달라는 것이던가.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할 순 있겠지만 여전히 죽을만한 죄는 아니다. 애초에 그는 이웃나라 공주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 여겼고 내내 좋아하지 않았던가. 인어공주에게도 계속 그 사실을 말했었고 말이다. 그 모든 오해와 어긋남은 비극이라 안타깝지만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태어나지 않았던가.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어느 노래처럼 말이다.(바람이 분다, 이소라)


  이웃나라 공주도, 마녀도, 왕자를 죽이라고 단검을 가져다 준 언니들도 그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 언니들조차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으니. 사랑하는 가족이 혼자 다른 세계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기에 그 대응은 과한 것이 아니다. 현실에선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으로 족할 수 있지만 저기는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다시 인어가 되기 위해 왕자의 죽음으로 얻을 수 있는 피가 필요했을 뿐이니 말이다. 마법적 설정이다. 그렇게 인어공주도 악역의 자리를 빗겨간다. 사실 왕자를 죽이지도 않았으니.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의 눈으로 그것도 인어공주 원작을 읽어보니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인다. 어린이의 시선에 맞게 각색된 책이 아닌 원작은 생각보다 냉정하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원작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결말 부분의 착한 아이들에 대한 언급 뿐이다. 각색되지 않은 원작의 인어공주는 어린이에게 읽어주기엔 우울하고 아프고 무섭고 슬프고 차갑다. 성인이 읽어도 똑같다. 그저 디즈니의 결말처럼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결말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서의 교훈을 알았으면 좋겠다. 인어공주는 인간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영혼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나 스스로 영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300년의 평온한 생을 대가로 얻고 싶었던 영혼이라는 가치는 타인의 선택을 받아야만 겨우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어공주는 사랑으로 영혼을 얻지 않았다. 사랑만이 결말이 아니고, 해피엔딩이 아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


  인어공주는 사랑때문에 쓰인 글이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을 해준다. 물거품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인어공주가 공기의 정령이 되어 세상을 떠다니다가 영혼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듯이 -천국에 가란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바친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랑이 생겨나고 끝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나의 사랑이 끝나도 세상은 그대로 있다. 비록 죽을 듯 힘든 순간이 있겠지만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이야기는 말한다. 인어공주는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되는 제약이 왕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다시 인어가 되는 것이라면 바다로 돌아왔을 것이고, 그저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이었다면 인간 세상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슬프지만 물거품이 되는 것은 공기의 정령이 되어 영혼을 얻기 위해, 인간 남성의 사랑을 받아서라도 영혼을 얻고 싶었던 인어공주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었던 안데르센의 친절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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