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30. 15:31ㆍ서사

독서 기록용으로 블로그를 만들었는데 막상 블로그에는 글을 거의 적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그러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지만, 디지털 기록과 아날로그 기록의 사이에서 한동안 다시 연필로 쓰는 재미를 떠올린 것도 있다. 하얀 종이에 사각사각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적고 연필을 깎으면 다시 예리해지는 심과 나무의 향이란. 그래서 적는 과정이 더 즐거웠다. 또 적는다는 행위가 신기한 것이 마냥 한 가지를 적다가도 생각보다 먼저 손으로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가려고 했던 곳보다 한 걸음 더, 전에 있었지 이런 비슷한 게…? 하면서 적어내려가는 즐거움이란. 새로운 학기가 되면 새 공책을 사는 취미만 있던 사람인데 책 몇 권을 읽고나니 오래 가지고 있었던 공책이 적어내린 글로 가득해졌다. 공책을 채웠으니 이것은 이제 책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게 몇 권의 (공)책과 독서노트와 독서기록장(정말 읽은 책을 기록만 해둔다.)과 그 비슷한 것 몇 권을 합쳐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아마도 지금까진 올해 내내 가장 아낀 물건들이 아닐까.
이렇게 기록하는 것들에 애착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소 심심했기 때문이다. 일견의 사정으로 본의 아니게 할 수 있는 취미의 범위가 잠시 줄어들어있고, 본래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 올해는 연초부터 독서에 시간을 더 쏟았다. 안그래도 정적인 삶인데 정의 정점을 찍고 있고, 모순적이게도 독서가 그중 가장 자유로웠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이겠지만 말이다. 올해 블로그에 남긴 독서 기록은 딱 한 권 뿐이지만 24년 현재 기준으로 올해 30권을 읽었고 (꾸준히 읽고 있다.) 어제부터 새로 인생의 역사(신형철, 2022)를 읽기 시작했다.
(이어서) 책을 읽는 속도보다 구입(소장)이 빠른 소장학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 중 유난히 좋아하는 수집은 평론집이나 작가의 전기같은 것이 있다. (다른 것도 물론 다 다른 이유로 좋아해서 모으고 있지만) 저 매우 다른 두 가지의 공통점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모아져있는 보물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평론집은 어떤 평론의 방향성을 위하여, 작가의 전기는 한 사람의 생애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례를 모으는 다른 분류의 책들도 결은 같겠으나 이 두 장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둘은 나에겐 성배같은 존재란 점이다. 그리고 아직 마시지 않은. 독은 없을 것 같은. 잠시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감독과 제목과 영화 포스터 이미지만 있으면 대충 나의 호불호가 어느정도는 예상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볼 영화를 정하고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그것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몇 년을 기다리는 작품 수준이 아니고선 예고편도 거의 찾아보지 않는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물론 보고있으면 대충 예상이 되지만) 그 자체로도 재미있기 때문에 시놉시스나 남들의 평가를 미리 보고 가지 않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평론집이나 전기같은 경우 일종의 답안지같은 것이라 아주 소중히 모으면서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언젠간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보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동시에 아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생각했구나 함께 감탄하기 위해.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시에 직업적으로 읽는 것이기에 내가 그것보다 절대 빠를 수도 없고, 책들은 계속 쓰여질테니. 그렇다고 다른 책들처럼 쭉쭉 읽어나갈 순 없겠으나 올해부턴 내심 정해뒀던 성역같은 책들을 마음 편히 읽어보기로 한다. 인생의 역사는 신형철 평론가의 책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인데 시화라는 점이 더 좋았다. 나는 좋아하는 시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시를 많이 읽은 사람은 아니기에. 평론서를 답안지같다고 했지만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것은 이정표도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취향으로 쓰여진 친절한 안내서. 신형철 평론가의 모든 글을 다 읽은 것이 아니기에 아직 무엇을 말하기 매우 이르지만, 지금껏 접해본 그의 문장들은 삶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있어서 좋았다. 언젠가 그의 책을 다 읽을 날이 오겠지, 신간을 내내 기다리다 바로 읽는 순간도. 오늘은 조금 날이 흐리고 공기가 차갑다. 이런 날에도 시를 읽기 좋은 것이다. 조용한 밤에도, 따뜻한 봄날에도, 끈적이는 여름과 소음 속에서도. 오늘은 흘러넘치는 마음으로 적지 않을 수 없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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