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8. 21:17ㆍ서가

-
짙은 파란색의 표지와 재와 물거품이라는 어딘지 접점이 없으면서도 같은 속성을 가진 단어들로 이루어진 제목에 이끌려서 이 책을 집었었다. 재와 물거품. 무언가 존재가 잡힐 듯하면서도 사라질 것만 같은 것. 보이지만 어딘가 허무한 느낌을 주는 것들. 그 자체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과정의 순간 같은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고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잊히지 않아 몇 번을 읽었고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1. 재와 물거품은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인어인 수아와 인어의 사랑이자 구원인 마녀 마리. 인어는 마녀를 구원하고 마녀는 인어를 구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서로의 구원이다. 서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사랑이다.
2. 마녀는 무녀였다. 무녀들은 대대로 무녀였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기원하고 바다에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새 무녀를 낳으면 쓸모를 다했다. 무녀는 존중받았으나 그 존중은 기원을 드릴 때에만 잠시 반짝하는 것이었다. 무녀는 그 자체로 도구였다. 정결한 기원을 위해서만 살아 숨쉬는 존재. 아무리 정성을 다해 기원을 드려도 바다가 분노한다면 언제 제물이 될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 여성. 마을 사람들은 무녀의 상태는 개의치 않고 언제나 기원을 요구했으며 남녀 불문하고 강도가 다른 성희롱을 일삼는다. 작은 어촌 마을이라는 사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무녀였다. 남들을 위해 언제나 기원을 드리지만 아플 때 아플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없고, 아주 작은 자신의 행복조차 소원할 수 없다. 무녀(巫女)는 여성이어야만 하며 착취당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무녀는 마녀가 된다.
3. 마리와 수아는 각각 재와 물거품을 대표한다. 무녀는 재가 되어 죽고, 인어는 물거품이 되어 죽는다. 각자 상대의 죽음을 겪고 고통받고 슬퍼하지만 다시 서로를 찾아낸다. 상대의 행복을 바라며. 어찌 된 영문인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찾아낸다. 찾아낸 상대는 기억이 없지만 어느 세계에서든 그들은 결국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 자신의 몸을 바쳐 기원을 하고 희생한다. 이미 죽어 사라진 존재임에도,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마침내 서로를 기억한 채 만난다. 함께 죽고서야 다시 함께 할 수 있다.
4. 그들의 외부는 항상 공격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몸 자체를 노리는 남성들, 그런 남성들과 연결하기 위해 접근하는 어떤 여성들. 마리와 수아가 호의로 다가가도 그 호의를 돌려받기는 힘들다. 그나마 호의를 호의로 돌려주거나 예상치 못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모두 여성들뿐이다. 남성에게 베푼 친절은 그것이 어떤 승낙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신되어 한밤중 취객의 폭력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피해자가 아닌 이들로부터 용서받는다. 그것이 용서일까? 돌로 쌓은 담, 높아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담. 경계적인 태도, 그것이 다 어디로부터 오는지는 자명하다. 모든 여성은 그렇게 마녀로 태어나지 않는다. 마녀는 만들어진 것이다. 마녀가 무녀였던 것처럼. 한때 자신의 행복보다 타인의 무사를 우선해 평생을 기원하던 것처럼. 무녀를 마녀로 만든 이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5. 마녀는 태어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마녀는 괴물과 치환될 수 없다. 마녀는 대화할 수 있는 여성이다. 여성이라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는 만들어진 마녀다. 태어난 무녀였다. 마녀가 마녀로 태어났는지, 실제로 마녀인지, 능력이 있는지, 악한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녀는 그저 불리우는 것이다. 마녀가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힘을 가진 여성일 뿐이다. 여성의 힘은 위험한가? 마법사는 적대적 이미지가 아니지만 마녀의 이미지는 어딘가 어그려져 있다.
6. [수아의 존재 이유는 마리였다.]
7. 마녀와 인어. 어느 모로 봐도 둘 다 행복해질 확률은 낮아보이는 존재들이다. 둘의 조합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마리와 수아는 다시 만났고,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했다. 마리와 수아가 다시 행복해질 기회가 주어져서 좋았다. 그들은, 여성들은 조금 더 행복해져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 자체로도 하나의 기원일지 모른다.

- 저자
- 김청귤
- 출판
- 안전가옥
- 출판일
- 2021.05.31
'서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당신이라는 세계 : 팔꿈치를 주세요 / 황정은, 안윤, 박서련, 김멜라, 서수진, 김초엽 (1) | 2023.12.17 |
|---|---|
| 얼어있길 바라는 : SF보다 Vol. 1 얼음 / 곽재식, 구병모, 남유하, 박문영, 연여름, 천선란 (0) | 2023.04.30 |
| SF보다 Vol. 1 얼음 서평단 (0) | 2023.04.20 |
| 기억의 순간 : 파과 / 구병모 (0) | 2023.04.14 |
| 꿈 (0) | 2023.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