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4. 22:45ㆍ서가

1. 파과라는 제목의 울림이 좋았다. 소리 내어 말하면 어쩐지 깨진 복숭아의 향이 날 것만 같은. 구병모 작가는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으깨진 과일이라는 뜻으로 쓰기 시작했고, 결말을 내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짚어보니 여러 뜻을 담기 위해 중의적인 의미로 한자를 넣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복숭아 표면의 짧은 솜털과 옅은 분홍과 붉은색이 섞인 그 단 것을 떠올렸다. 아마도 표지의 색상이 한몫했을 것이다.
2. 킬러의 이야기는 흔하다. 그러나 여성 킬러는 드물다. 그것도 노년의 여성은 더더욱 본 적이 없다. 조각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새롭다. 지하철이라는 익숙하고 지루한 공간을 순식간에 생각지도 못한 공간으로 재창조한다. 하지만 조각은 일을 할 때 빼고는 어쩐지 서툴러 보인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3. 조각이라는 인물은 순수하다. 사랑에 잘 빠지고, 의식하지 않고도 친절하다. 순수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계를 두고 싶지 않다. 어려야 순수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순수를 가리는 것도 아니다. 타고나서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 영영 잃는 것도 아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없어지는 것과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니까. 조각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강 의사를 사랑했고, 류를 떠올렸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소년이었던 투우에게 친절했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의 삶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평범’한 조각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결혼이 절대 사랑의 끝은 아니지만 조각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아이는 하나 혹은 둘쯤있고, 역시나 길에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을 것 같은 강아지를 데려와 오래오래 키웠을 것이다. 아침을 맞고, 저녁을 걷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을 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각의 삶은 운명에 의해 조각되었고, 상황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깨어졌다. 사람의 삶이란 그런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길을 가곤 한다.
4. 무용이 조각의 삶에 이정표였듯이, 조각도 무용의 이정표였을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삶에 특화된 강아지와 주인의 관계는 말이 적었지만 서로에게, 누구보다 가까웠다. 누구보다 방범에 신경을 쓰던 조각은 무용을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창을 내고 그것만큼은 잠그지 않았다. 잊지 않고 밥을 주기 위해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인연이라곤 주워진 것뿐이라 해도.] 류가 조각에게 했던 것처럼, 조각도 무용에게, 무용도 조각에게 주워졌다.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고,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했던 이들은 자꾸만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만들었다.
5. 류는 갈 곳을 잃은 조각에게 지낼 곳을 만들어 주었고, 의도는 아니었으나 평생의 직업을 줬다. 폭발에서 조각을 감싸며 죽은 그는 파편처럼 조각의 삶 곳곳에 박혔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되어 매 순간 선명하게 나타난다. 조각의 생을 이어준 것은 하느님이 아니었고, 누군가의 손이었고 품이었다. 사람이 내비칠 수 있는 친절이나 호의는 그렇게 누군가의 생을 바꾼다.
6.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7. 잘게 빻아진 알약의 가루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헤드에 아무렇게나 손가락을 걸고 잡아 뽑은 녹화 테이프 같지만 그중 의식이 닻을 내리고 정박할 수 있는 장면은 하나뿐이다.] 투우의 생도 그랬다. 비록 조각은 의도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던 순간들이었지만 그 작은 기억에 그가 평생을 매달려있던 것처럼. 투우가 하고 싶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던 그 마음이 복수라는 이름이 아니면 안되었던 것이다. 무엇에도 가리지 않은 진실은 그저 휘날리는 꽃잎들이 들어오던 창가에 있던 조각에게 손을 뻗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8. 서로의 온 마음이 맞닿는 사랑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파과는 내내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이어지지 않더라도, 닿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기억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조각처럼 나도 그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자꾸만 상상해보게 된다.
9. 그래서 노년이란 무엇일까. 조각은 65세이고, 일상조차 점점 잊어가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기억한다. 조각은 손톱 위에 순간을 올린다. 순간이란 흘러가는 것이고, 잊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순간을 잡아두고 싶어 한다. 존재의 탄생과 동시에 과거가 되어 희미해지는 찰나를. 기록하고 물성을 주어 실체를 만들고 손에 쥐려 한다. 잡을 수 없는 존재를 그렇게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우습게도 가장 인간답다. 모든 사랑은 순간이고, 순간은 모두 과거가 되고, 앞으로 태어날 순간들도 운명된 과거가 될 것이기에. 사랑에 대한 얘기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사랑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10. 노년은 나이가 아니다. 그 명칭은 포기하는 자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것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멈추는 때에 노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가기로, 계속 걷기로 결정한 조각은 청춘이다. 투우에겐 조각이 영원히 꽃잎이 흩날리던 창가의 사람으로 기억되듯이.
11. 구병모 작가의 이야기는 쓸쓸하게 찬란하다. 아가미도 그랬고, 파과도 그렇다. 다른 이야기들도 모두 그럴까. 소설이 가장 재미있어지는 순간은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이,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파과의 외전인 파쇄가 나왔다. 조각이 킬러의 길을 걷기 시작한 10대 시절 이야기다. 그때의 조각도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겠지. 해선 안 될 사랑이었지만 모든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니까. 소설 속에서만큼은 그런 사랑도 가끔 괜찮을지도.

- 저자
- 구병모
- 출판
- 위즈덤하우스
- 출판일
-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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